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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GT - 애스톤 마틴 본문

자동차

럭셔리 GT - 애스톤 마틴

harovan 2014. 11. 20.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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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애스톤 마틴(Aston Martin)에 대해 조금 알아 볼까요? 애스톤 마틴은 지난 9월 국내에서도 공식 출시되며 판매에 돌입했고 이미 본드카(007)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최근 영국에서는 가장 쿨한 브랜드로 인식되어 있는 자동차 회사이고 돈 많은 중동 갑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애스톤 마틴이지만 그 역사를 살펴보면 대부분의 영국 자동차 회사들이 그렇듯 결코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애스톤 마틴은 1913년 영국에서 라이오넬 마틴(Lionel Martin)과 로버트 뱀포드(Robert Bamford)가 '뱀포드 & 마틴'을 세우며 시작됩니다. 뱀포드 & 마틴은 싱어(Singer) 같은 차를 파는 사업으로 시작했지만 레이스이기도 했던 마틴이 1914년 싱어를 튜닝해 애스톤 힐 클라임(Aston Hill Climb)에 참가한게 애스톤 마틴의 진정한 스타트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애스톤 힐 클라임에서 자신감을 얻은 마틴은 첫 모델을 '애스톤 마틴'이라 이름 짓고 생산라인을 짓고 1915년 3월 첫 차를 생산합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은 전쟁 중이었습니다. 1914년 몇 주면 끝날 것 같던 전쟁은 확전을 하고 있었고 영국은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을 기점으로 1914년 8월부터 이미 세계대전에 깊숙히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애스톤 마틴은 정상적인 영업을 할 수 없었고 모든 장비는 군용기를 생산하던 '솝위드'라는 회사에 팔리고 마틴은 해군으로 뱀포드는 육군으로 참전하며 애스톤 마틴은 사라질 위기를 맞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마틴과 뱀포드는 다시 사업을 시작했지만 1920년 뱀포드가 사업을 접고 떠나고 엔지니어이자 레이싱 드라이버였던 루이스 즈보로브스키(Louis Zborowski)가 마틴의 파트너가 됩니다. 애스톤 마틴은 1922년에는 세계 최초의 서킷인 브룩랜즈에서 내구 레이스 최고 속도 기록을 세웁니다.  


프랑스 그랑프리에 참가하는 등 모터스포츠에 힘을 썼지만 차량판매 실적은 부진했고 1924년 파산하며 찬우드 부인에게 인수되어 부인의 아들 존 벤슨이 경영진으로 합류했습니다. 회사는 이듬해 다시 파산을 했고 1926년 창업주인 라이오넬 마틴이 회사를 떠나며 문을 닫습니다.



1926년 말에 빌 렌윅(Bill Renwick)과 아우구스투스 베르텔리(Augustus Bertelli)를 비롯한 투자자들이 회사를 인수하고 회사 이름을 뱀포드 & 마틴에서 '애스톤 마틴'으로 바꿉니다. 렌윅과 베르텔리는 원래 자신들이 강점을 보여왔던 엔진을 당시 난립했던 영국의 자동차 회사들에 판매할 작정이었지만 자신들의 차를 만들기로 결정합니다. 이후 레이싱 전용 차들을 비롯해 2인승 컨버터블을 주로 생산하며 어느 정도 입지를 구축합니다.


베르텔리는 오너-생산-드라이버까지 맡아 애스톤 마틴을 타고 내구 레이스인 르망과 밀레 밀리아에서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1932년 다시 재정난에 빠졌지만 L. 프리도 브룬(Prideaux Brune)에 의해 되살아나고 1936년부터는 로드카 생산에 집중했지만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해 시설이 군용기 생산에 동원되기 전까지 700대 생산에 그쳤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애스톤 마틴은 1947년 트랙터를 만들던 데이비드 브라운에 의해 인수됩니다. 브라운은 애스톤 마틴은 물론 당시 럭셔리카를 만들던 라곤다(Lagonda)를 같이 인수해 인력과 생산 인프라를 공유했으며 1955년에는 엔지니어링 회사인 틱포드도 인수하며 현재 애스톤 마틴의 뼈대를 만들었습니다.


데이비드 브라운이 애스톤 마틴을 인수하며 애스톤 마틴의 로고에서는 David Brown이 박혀 들어가고 아직까지 이어지는 애스톤 마틴의 'DB'가 시작됩니다. 로고에 떡하니 자신의 이름을 박아 넣은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데이비드 브라운은 자신의 이름이기 이전에 회사의 이름(David Brown Ltd)이기도 하니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여하튼 브라운은 전후 애스톤 마틴 구세주였던건 분명하고 라곤다를 같이 인수하며 애스톤 마틴에게 럭셔리를 심어준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브라운 시절 애스톤 마틴은 드디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합니다. DB2 로 시작된 애스톤 마틴의 성공은 DB5에 이르러 만개를 합니다. 애스톤 마틴 DB5은 1964년 007 골드핑거에서 숀 코네리가 타고 나와 대표적인 본드카가 되었고 이후에도 영화에 종종 모습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DB4부터 이미 애스톤 마틴은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고 영국의 엔지니어링과 이태리의 스타일링이 합작품으로도 유명했습니다. DB5은 자연스레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고 애스톤 마틴을 대표하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브라운이 오너가 된 이후 애스톤 마틴의 2도어 쿠페 모델은 출시되는 족족 성공을 거두었고 이로서 애스톤 마틴은 GT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데이비드 브라운이 애스톤 마틴을 인수하고 애스톤 마틴은 잠시 승승장구 하는듯 싶었지만 1972년 다시 재정난에 빠지고 Company Developments라는 컨소시엄이 인수를 합니다. 1975년 다시 부도가 나서 다시 주인이 바뀌어 이번에는 미국인 피터 스프레그와 캐나다인 죠지 민덴이 애스톤 마틴의 오너가 됩니다.



스프레그-민덴은 360명을 새로 고용하고 2년만에 영업이익을 75만 파운드로 올립니다. 이들은 애스톤 마틴의 라인업을 현대화하며 V8 밴티지, 볼란테 컨버터블, 라곤다 같은 차량을 만들어 내며 재기에 성공하는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경기침체가 시작되며 사업을 유지하고자 차량 복원 사업 등에 집중하다가 1980년 페이스 페트롤리움(Pace Petroleum)의 빅터 건틀렛(Victor Gauntlett)이 지분 12.5%을 인수하며 새로운 주인이 됩니다. 이후 1981년에는 건틀렛이 CH 인더스트리얼(CHI)의 팀 힐리가 50/50 지분을 유지하며 회장에 취임합니다.


건틀렛이 이끄는 애스톤 마틴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4시터였던 라곤다를 중동 국가에 수출할 계획을 세우고 1982년에는 찰스 왕세자로부터 왕실 조달증(RWA)을 획득하며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킵니다.(아마 이때부터 중동 부호들은 애스톤 마틴을 좋아라 했나 봅니다) 



애스톤 마틴이 자금난에 빠지자 건틀렛은 1983년 자신의 비지니스인 페이스 페트롤리움을 쿠웨이트에 매각하고 미국과 그리스의 자본을 받아들여 유동성을 확보합니다. 여유가 생긴 건틀렛은 이태리의 유명 디자인 회사인 자가토(Zagato)의 지분을 인수해 안정적인 협업라인을 구축했고 1984년에는 애스톤 마틴의 1만째  차를 생산했습니다.


1987년 5월 건틀렛은 마이클 왕자(켄트공)와 밀레 밀리아 부활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포드 유럽의 부회장이었던 월터 헤이즈를 만나게 됩니다. 이자리에서 헤이즈는 건틀렛에 애스톤 마틴 지분 인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장기적으로 생존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필요했던 건틀렛은 같은해 9월 포드의 지분참여를 수락합니다.



포드가 애스톤 마틴에 참여한 이후 애스톤 마틴은 20년 넘게 생산되어 오던 V8을 단종시키고 십수년만의 신모델인 비라지(Virage)를 선보입니다. 회장직을 유지하고 있고 건틀렛은 1991년 회장직을 헤이즈에게 넘기고 애스톤 마틴을 떠납니다. 포드는 1992년 밴티지를 발표했고 1993년에는 엔트리 모델인 DB7을 발표하고 애스턴 마틴 모델 중 최다 판매량을 자랑하는 대성공을 이룹니다.


애스톤 마틴을 안은 포드는 링컨, 재규어, 랜드로버, 볼보를 묶어 PAG(Premier Automotive Group)을 만들어 럭셔리 마케팅에 나섭니다. 애스톤 마틴을 위해 새로운 팩토리를 마련하고 라인업을 현대화하며 뱅퀴시, DB9, 밴티지 같은 차를 연이어 발표하며 애스톤 마틴의 캐릭터 라인을 완성합니다. 또한 독일 포드로 부터 엔진을 공급합니다.



2005년부터는 르망 24에 팀을 만들어 출전하며 F1의 재규어 레이싱과 함께 포드의 유럽 모터스포츠 마케팅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습니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2007-2008년에는 GT 클래스에서 우승도 하고 2009년에는 LMP-1으로 출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살림이 좋아지지 않은 2006년 포드는 내부적으로 PAG를 해산하기로 결정하고 링컨을 제외한 모든 산하 디비전을 매각하기로 합니다. 


PAG 산하의 브랜드 중 애스톤 마틴은 가장 먼저 팔려나갔습니다. 새 구매자는 애스톤 마틴의 르망 파트너였던 프로 드라이브(Pro Drive)의 데이비드 리차드/미국 투자가/쿠웨이트의 투자회사 컨소시엄에 4억 7,500만 파운드에 매각되었습니다. 



F1 BAR와 베네통의 프린서펄이기도 했던 데이비드 리차드는 2007년 애스톤 마틴을 인수하자마자 아시아로 시장을 확대하는 전략을 폅니다. 그 일환으로 V8 밴티지의 성능과 내구성을 증명하는 프로모션을 단행, 일본 동경에서 터키 이스탄불까지 12,089 km와 런던까지 추가로 3,259 km를 달리는 이벤트를 성공시킵니다.


이벤트를 성공시키고 3개월이 지나고 애스톤 마틴은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 성공적으로 구축했고 2008년에는 중동지역 고객들을 메인 타겟으로 라곤다의 부활을 결정합니다. 포드가 현대화 시킨 애스톤 마틴은 데이비드 리차드가 마케팅으로 성공하며 유럽을 벗어난 글로벌한 럭셔리 GT 브랜드로 탈바꿈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 쿠웨이트 투자회사 중 하나가 애스톤 마틴의 지분을 정리할 때 인도의 마힌드라 & 마힌드라가 애스톤 마틴의 지분을 획득하리라는 예상이 있었지만 Investment Dar의 지분은 이태리의 투자펀드에게 넘어갔습니다. 재규어와 랜드로버를 인수한 인도 타타의 라이벌이기도 한 마힌드라는 애스톤 마틴 투자로 타타에 맞불을 놓을 작정이었지만 실패했습니다.


2013년 애스톤 마틴은 새 라인업에는 기존 포드 엔진 대신 메르세데스의 고성능 엔진인 AMG을 쓸 수 있게 되었고 2014년 8월에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모그룹인 다임러가 애스톤 마틴의 지분 5%를 인수하며 보다 전략적인 파트너 관계를 구축했고 다임러는 2017년으로 예정된 애스톤 마틴의 첫 SUV에 관여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어 9월에는 인피니티를 이끌던 앤디 팔머(Andy Palmer)가 새 회장으로 취임하며 애스톤 마틴은 다시 새로운 시험대 위에 섰습니다.



브랜드 스토리를 준비하며 많은 자동차 브랜드들의 역사를 살펴보았는데 애스톤 마틴처럼 오너가 자주 바뀐 회사는 못봤습니다. 특히 데이비드 브라운과 포드 사이에는 정말 눈코 뜰새 없이 주인이 바뀌었고 그 수많은 역경을 모두 이겨내고 오늘날 이렇게 최고의 럭셔리 브랜드 중 하나로 살아남은게 신기할 뿐입니다. 판매량이나 브랜드 인지도는 아직 라이벌들에 미치지 못하지만 애스톤 마틴은 아시아를 비록한 신흥시장에서 빠르게 영역을 확대하고 있으니 앞으로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브랜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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